스며들다 1화
1. 김연유에 대하여
나는 공시생이다. 사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는 건 대외적인 가림막일지도 모른다. 처음 한두 해는 열정이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공시생 신분이다. 시간이 흐르며 기대와 낙방이 교차하고, 남는 건 초라한 내 자아뿐이었다. 나는 갉아먹히고 있었다. 그 능동적인 부식 행위의 주체와 객체 모두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부터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졌다. 설령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만남과 대화가 내겐 너무나 버거웠다. 이렇게 사회성을 잃어가고, 혼자 살다가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지는 삶도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카페 <coffee 한 잔 할래요>
이 공간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산을 깎아 만든 이 동네에, 아주 얕은 언덕 위에 있었다. 봄이면 이곳저곳에 흐드러지는 벚꽃나무 대신에 라일락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있다. 동네에선 유일한 라일락이었다. 꽃이 만개하는 날 그곳을 지나가면 어린시절 걱정이 많지 않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옛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듯한 이곳은, 돌담과 파란 대문, 나무 간판과 연갈색의 카페 내부가 조화로워 보였다. 이곳에 머물면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온에는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는 라일락나무 향기가 맡고 싶어서 그 카페 앞을 부러 지나갔다. 그런데 한 남자가 흰 종이ㅡ[직원 구합니다. 들어와요]라고 써있는ㅡ를 파란 대문에 붙이고 있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적당한 팔근육을 자랑하듯이 접어올린 흰 셔츠, 검정 슬랙스, 갈색 구두 차림이었다. 꽤 훤칠했다. 저 사람이 사장인가? 꽤 젊어보이는데. 글씨체도 멋있구나.
집에 들어와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그 남자도, 그 카페도. 둘 다 내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는데, 다 아는데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현실과는 다르게 그곳에서는 동화가 펼쳐질 것 같았다.
3. 들어가다
마지막 남은 용기를 그러모아서, 면접을 보려고 카페 앞에 왔다. 아니면 말고. 뭐 어때. 그냥 가볍게 인사만 하고 온다고 생각하자. 나는 세상에서 제일 밝은 사람이다, 주문을 걸고 가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남자가 인사했다. 오늘은 갈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어쩐지 따뜻한 느낌이었다. 어제 모집공고를 붙이는 모습을 본 것 이외에는 오늘이 처음 보는 건데 왠지 낯이 익었다.
"안녕하세요! 카페 직원 구하신다는 벽보 보고 왔는데요! 아직 구하시나요..?"
"풋! 으헠허허흐흨ㅋ 벽보? 조선시대에서 왔어요? 예쁜 아가씨가 단어 선택이 그게 뭐야. 아 저거 말씀하시는구나. 그럼요. 아직 구하죠. 저기 앉아요."
머쓱해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게 이렇게까지 놀릴 일인가.. 역시 잘못 들어왔나..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쁘다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손님들을 꼬시는 건가? 저 얼굴이면 감언이설 없이도 손님들이 많이 올 텐데.. 참 무한경쟁시대구나.
"잠깐만. 커피는 뭐 좋아해요?"
"저 아이스 아메리카노 좋아합니다."
"아메리카노. 저도 아메리카노 좋아해요. 차갑기는. 하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차가운 거 좋아한다더라. 잠시만 기다려줄래요? 금방 두 잔 만들어서 갈게."
"아.. 감사합니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만들었다. 잠시후 그는 커피를 들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 프리지아 향이 났다. 저렇게 멋진 사람은 체향도 좋구나... 따로 향수를 쓰는 건가? 여자인 나도 향수는 안 쓰는데.. 아, 집중해서 면접이나 잘 보자. 나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면서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어? 웃는 상이다. 너무 잘 웃어요. 미소천사같애. 오케이 1차 통과."
"제가요? 하하 감사합니다."
"우리 손님들이 너무 좋아하겠다, 이렇게 잘 웃으면. 내가 찾던 딱 그런 직원 같아요. 부러워요 웃는 거. 나는 태생이 고독한 사람이라서 웃는 방법을 잘 이해 못해요. 근데 또 고독은 즐겨. 나도 나 잘 모르겠다. 나 너무 알려고 하지 말아요,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dangerous."
고독은 무슨, 당신같이 잘난 사람이 고독을 정말로 알까. 거짓으로 미소짓는 나같은 사람이나 고독을 알지. 생각하며 나는 또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어떻게 그렇게 웃는 게 예쁘지? 나도 웃는 거 연습해야겠다. 한 번 봐줄래요?"
그가 미소짓는다. 눈꼬리가 휘어진다. 남자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건가?
"나 어색했죠."
"아뇨. 사장님이 웃으시니까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네요."
"뭐가 보니까 기분이 좋아져. 그만 띄워요. 나도 연습할게요."
그가 머리를 매만지며 묻는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스물일곱입니다."
"나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예요? 장난하지 말구. 맙소사. 나는 처음 봤을 때 그냥 미운 7살 같았어요. 밉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나이잖아. 나 진짜 그렇게 봤어. 진짜 동안이네요. 왜이렇게 부끄러워해요. 그냥 동안이라고 하는 건데. 나 진짜 그렇게 봤어요. 미운 7살처럼."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메리카노를 들어서 한 입 마셨다. 그의 시선이 커피를 따라 나를 좇았다. 저 남자는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밖으로 내지? 잘생기고 잘난 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아니에요, 그런 말 처음 들어요. 그러는 사장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내 나이 물어보지 마세요. 나 사적인 질문 안 좋아해요. 지금 공적인 자리잖아. 사적인 질문 하지 말아요. 나 그럼 싫어. 그럼 더 미워."
"혹시 저보다 어리실까봐요."
"뭐가 내가 더 어려보여. 나 안 어려. 나 그쪽보다 많아요, 한참. 진짜 짓궂어. 놀리지 말아요. 앞으로 미운짓 하지 않겠다고 약속."
그가 새끼손가락을 앙증맞게 들어올리며 나를 나긋하게 쳐다본다. 나는 그저 바라만 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안 거는 거 봐, 또 미운 짓. 오케이.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준다. 2차 통과."
그가 입꼬리를 잔뜩 올리면서 또 크게 미소짓는다. 눈매가 더 짙어보였다.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좋아한다."
티 났나..?
"커피 만들 줄 알아요?"
"아니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몰라도 돼. 왜 이렇게 겁먹어. 아니에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가 알려주면 되잖아. 내가 하나씩 알려줄게요. 하나하나, 차근차근, 사뿐사뿐. 내가 알려줄게요. 걱정하지 마. 어.. 오케이. 여기서 question 하나. 커피는 어떻게 만들까요?"
"어... 원두를 넣고... 갈아서....? 원액을 뽑고.. 물을 타서.. 손님에게 드린다..?"
"원두를 넣고, 갈아서. 원액을 뽑고 물을 타서 손님에게 드린다. 원리는 이해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근데 딱 하나 빠졌어. 뭐가 빠졌는지 알아요? 바로 사랑 빠졌잖아. 이거 빠지면 손님들 다 느껴요. 사랑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원액을 빼서 물을 넣고, 마지막은, 쪽. 사랑 넣기. 이거 꼭 해줘야 돼요. 이게 내 커피 철학이야.
"멋있으세요. 정말로요."
"내가 뭐가 멋있어. 안 멋있어. 그냥 내 신념이고 신조일 뿐이에요. 나 그렇게 멋있는 사람 아니에요. 됐어, 그만. 사적인 얘기 하지 마. 벌써 내가 하나 가르쳐줬네요. 그쪽은 벌써 하나 배웠구. 축하해요, 바리스타 된 거. 바리스타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또 싱긋 웃는다. 이 사람은 이렇게나 잘 웃으면서.
하마터면 나랑 비슷한, 쓸쓸한 사람이라고 동질감 느낄 뻔 했잖아.
"다음에는 라떼도 알려줄게요. 만드는 거 어려운 거 없어. 라떼아트, 간단해요. 난 가르쳐줄 때 화내지 않는 사람이에요. 최대한 매너 있게 가르쳐줘요. 그러니까 겁내지 말아요. 알았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도 벌써 친밀해진 느낌이다. 내가 약간 알 것 같은데, 왠지 당신은 화가 나도 화를 못 낼 거 같아. 맞죠? 이렇게 생각하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꾸 그러면 저한테 반할 수 있어요. 우리 카페의 수칙 세 가지 있어요. 지켜줄 수 있어요? 첫 번째, 지각 안 하기. 두 번째, 항상 밝게 인사하기. 세 번째, 최준한테 반하지 않기."
세 번째를 말하면서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그보다도... 내게 가능한 약속일까. 이렇게 멋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 세 가지만 지켜주면 돼요. 너무 어렵죠. 내가 너무 어려운 부탁 했죠. 근데 이거 못하면 나도 같이 일 못해요. 미안. 같이 일하면서 나한테 반해버리고 나한테 사랑에 빠져버리면 나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잃은 사람이 너무 많아요. 내가 아꼈던 직원들... 다 나한테 반해버리고 나 힘들게하고 다 가버렸잖아."
먼 곳을 응시하며 지난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그의 눈빛이 너무 쓸쓸해보였다. 그래도 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 집요했다.
"혹시 그거 지켜줄 수 있어요? 가능하겠어요?"
"노력하겠습니다."
"아뇨. 가능해요 안 가능해요? 그것만 말해요. 노력하겠습니다는 내가 원하는 답변은 아니었는데요."
너무나 단호했다. 역시나 지금이라도 나는 도망쳐야 하는 것일까. 내가 대답 없이 커피를 홀짝이자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꺼냈다.
"그래요. 우리 같이 노력해봐요."
그가 내 눈을 통해 마음속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 들킬 것 같아 얼른 눈을 피했다.
"제 코끝에 점 보지 마세요. 반할 수 있습니다. 이거 보지 마세요."
"..."
"그 눈빛 뭐예요. 그거 하지마. 나 정말 화내요. 나 무서운 사람이야. 나 무서운 사장이에요. 미안. 나 지금 그쪽 그 눈빛이 너무 예사롭지 않아서요. 나 조금만 생각하고 연락해줄게.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어요? 그쪽도 조금만 생각하고 나한테 연락을 줘요."
그가 메모지와 펜을 내게 건넸다. 나는 내 번호를 적어서 돌려주었다.
그때 카페에서 이런 음악이 흘렀다.
<안녕, 이제는 안녕. 이 말 도저히 할 수가 없어.>
시그널인가. 역시 나랑 맞지 않는다는 건가..
"안녕히 계세요. 면접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나왔다.
1화 에필로그: 고양이 남자
어느 햇살 좋은 날이었다. 동네를 걷는데 골목 한 구석에서 어떤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다 큰 남자가 그러고 있는 모습이 퍽 우습기도, 귀엽기도 해서 무얼 하는지 봤다. 조금 더 가까이 가보니 고양이한테 말을 걸고 있었다. "너도 나처럼 외롭니?"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잠시간 고양이를 바라보다가, "꼭 행복하기. 약속."이라고 하며 자리를 떴다. 초롱초롱한 눈빛과 은은한 미소를 언뜻 본 것 같았다. 이런 사람도 외로움을 타는구나. 그럴 수 있구나.
면접을 보고 오는 길에 생각났다. 그때 그 고양이 남자가 카페 사장님이었어.
1화에서는 서담의 냉혹함을 알고 가네...
따듯한 아이스아메리카노같은다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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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 굿나잇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