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정부 여당이
사전투표,
공개투표 등 전대미문의
부정선거를 자행.
당일 경남 마산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1차 마산의거)가 발생.
경찰은
이를 무력 진압하였고
학생 중에서 사상자 발생.
1960년 3월 17일, 서울 대방동 성남고등학교
학생 400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
’정의를 위해 싸우는 학생을 구타하지 말라’, ‘경찰은 자숙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생운동을 시작.
1960년 4월 11일, 마산의거 당시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고등학생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
1960년 4월 18일, 자유당 정권은
조직폭력배
임화수 일당 및 정권의 앞잡이
정치깡패 등을 동원하여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무참하게 폭력 진압.
1960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 대학생을 필두로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참가.
4.19 시민혁명의 시작.
곽영주 경무관의 지휘 아래 대한민국 경찰은
시민들에게 발포하여 피의 화요일 사건 발생.
서울, 광주, 부산, 인천 등에서도
학생 주도의 시위가 연발.
같은 날
주한미국대사, 대한민국 정부에 ‘정당한 불만의 해결’ 요구.
미국 국무부,
대한민국 정부 상대로 4.19 혁명을
‘근래의 선거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 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묘사하며 항의.
1960년 4월 21일, 매카너기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만나 부정선거 관련자들의 축출을 주문.
1960년 4월 25일,
꺼져가던 시위의 불씨를 되살린 것은
서울대학교 대학교수단의 시위.
이어 258명의 대학교수단이 시국선언문을 작성, 낭독.
같은 날 10시경 시위하는 시민의 수는
10만 명으로 불어남.
피의 화요일 당시 수송국민학교 6학년 학생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면서 국민학생들까지 시위에 가세.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하야, 하와이 망명.
1960년 4월 28일, 이기붕 일가 동반자살.
1960년 5월,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 한희석 전 국회부의장을 비롯한
부정선거 관련자 구속.
1960년 11월, 국민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등 특별법 제정.
1961년 4월 17일, 제2공화국 특별재판소에서
부정선거를 총지휘 및 기획한 최인규 전 내무장관에게
사형 선고.
경찰 등 평화 시위 진압자 등에게 실형 선고.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1961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 설치.
1961년 12월,
3.15
부정선거 기획자
최인규 전 내무장관,
4.19
시민혁명 및 평화시위
진압 총책임자 곽영주
경무관 등에게
사형 확정 및 집행.
정치깡패로서
정권의 비호를 받아
시민 대상
테러, 폭력을 자행해온
이정재
(동대문시장 상인조합 이사장
자유당 중앙당 감찰부 차장
자유당 도시행정특보위원 역임)
임화수
(한국연예(주) 사장
한국무대예술원 부원장
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 역임)
등의
조직폭력배 전원
역시 사형 확정 및 집행.